사회생활 몇 년 하더보면 거기 실세가 누군지 빨리 파악하는 게 꽤나 도움된다. 병동에서는 당연히 의느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회진 이후는 집도의도, 주치의도, 인턴도 사라지는 ‘무의촌’이 되는지라 실세라고 하긴 어렵다.
그러면 누구냐, 병실의 주도권은 간병인 여사님들(남자 간병인들도 있지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주로 여사님들)이 쥔다.
울 아부이는 고대구로병원 응급실>응급중환자실>준중환자실>수술방>중환자실>준중환자실이라는 고된 여정을 거쳐 작년 12월 십며칠경 일반병실로 갔다.
주섬주섬 짐을 풀고 있는데 간병인 여사님이 이것은 이래라, 저것은 저래라 한다. 웬 참견이냐 싶어 건성건성 대답했다. 연세에 비해 피부가 보톡스 맞은 마냥 땡땡했으로 편의상 땡땡 여사님이라고 부르겠다.
대충 눈인사나 하며 지내던 땡땡 여사님과 라포르를 쌓은 건 깡말라 어린애처럼 조그마해진 한 할아버지가 아부이 바로 옆 침대로 입원하고서부터다.
여느 밤처럼 자지 못하고 뒤척이던 그날 밤 쾅 소리가 나서 벌떡 일어나 보니 할아버지가 침대 옆에 넘어져 있는 게 아닌가. 바로 비상벨을 누르고 간호사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한 시간 전 바닥에 주저앉아 쓰레기통에 토악질을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 터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차였다.
할아버지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뭔가 다급히 말했고 자세히 보니 자신의 몸보다 더 커봬는 폴대 밑에 깔려 있었다. 나는 침대 너머로 손을 뻗어 폴대는 잡아 일으켰으나 바로 세우기는 역부족. 마침 잠에서 깬 땡땡 여사님이 오셔서 폴대를 세워주셨다.
간호사도 달려왔다. 이러저러한 얘기를 들어보니 할이버지는 대장암 말기고 수혈을 하고 있었는데 메스꺼움 때문에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다. 같이 온 아들은 그 시간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지하 1층 의자에서 자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궁시렁 대기만 하는 간호사를 도울 마음은 1도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안쓰러워 간호사 대신 수혈 피가 잔뜩 묻는 침대 시트를 갈았다. 땡땡 여사님은 화장실로 가더니 연변 말투로 “바닥이 엉망이다”며 솔선수범 물청소를 했다. 그제서야 도망간 아들놈이 돌아오더니 또 할아버지 옆에서 잠만 쿨쿨 잔다.(난 그를 보고 조선 천하의 개자식이라고 속으로 욕했다. )
그렇게 뜻하지 않은 인명구조의 현장(?)에서 투합했던 땡땡 여사님은 그날 아침 사과도 깎아주고 나에게 그 아들놈은 욕하면서 “이집 아들 딸은 효자효녀다”라는 칭찬도 던져주셨다. (하지만 나도 찔리는 게 있는지라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능)
두번째 라포르는 바로 어제 밤, 이곳 재활병원에서다. 여기도 연변 동포로 추정되는 삼각김밥 머리 모양의 여사님이 계시다. 역시 어색한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는대 역시 같은 방 한 할부지 덕분에 인연을 맺게 됐다. 이 할부지가 설사병에 걸렸는지 시도때도 없이 푸륵 푸릉 하신다. 냄새는 OMG. 간호사실 앞 휴게공간으로 도망나오니, 삼각김밥 여사님도 나와서 내 옆에 앉으신다. 그렇게 우리는 고약한 냄새를 잠시나마 뒷담화했다.
아 이번 달이면 또 병실을 옮길텐데 그때는 또 어느 여사님과 마음을 나눌까.
덧붙임) 라포르(Rapport)는 프랑스어로 사람 사이에 생기는 상호신뢰관계를 말한다. 흔히들 라뽀라고, 병원에서 많이 쓴다. 의료진과 환자들 간의 신뢰를 뜻하며 의사 입장에서는 환자와 ‘라뽀를 쌓는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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